핵심 요약: 엔비디아가 내년 하반기 출시 예정인 AI 가속기 ‘루빈 울트라’의 HBM 사양을 당초 계획보다 낮춰 HBM4 8단 등 하위 구성으로 탑재하는 방안을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배경에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HBM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이 있으며, AMD와 PC·노트북 제조사까지 메모리 구성 조정에 가세하는 흐름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루빈 울트라 HBM은 어디까지 줄어드는가
테스트 샘플 가운데 일부는 메모리 용량이 192GB 또는 256GB로 확인됐고, 당초 공개됐던 1TB급 탑재 계획과 큰 격차를 보입니다. 구체적으로는 12단(12-Hi) HBM4E 대신 8단(8-Hi) HBM4 또는 HBM4E로 단수를 낮추는 시나리오가 검토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적층 수가 줄어드는 데 그치지 않고, 한 패키지당 쌓이는 메모리 다이가 줄면서 용량과 대역폭이 동시에 떨어지는 구조입니다. 업계의 관심 포인트는 이 같은 하향이 일부 SKU에 한정된 옵션 테스트인지, 양산 라인 전반으로 확대될지 여부입니다.
루빈 울트라가 노리는 시장은 100만 달러 이상짜리 AI 학습용 시스템입니다. 메모리 용량이 1TB에서 256GB로 줄어들면 한 번에 올릴 수 있는 파라미터 규모도 그에 비례해 작아지기 때문에, 실제로 양산 SKU에서 어디까지 타협이 이루어지는지가 핵심 변수가 됩니다.
왜 HBM 사양을 낮추려는가
핵심 이유는 메모리 공급 부족입니다. 빅테크의 AI 칩 수요가 폭증한 데 비해 HBM 생산 Capacity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메모리 확보 자체가 차세대 가속기 출시의 병목으로 작용했습니다. 사양을 한 단계 낮추면 동일 웨이퍼에서 더 많은 다이를 수확할 수 있고, 한정된 HBM 물량을 더 많은 가속기에 분배하는 효과가 나옵니다. ‘칩플레이션'(반도체 가격 상승)으로 불리는 비용 부담을 분산하려는 실용적 대응이죠.
같은 메모리 Capacity 안에서도 12단보다 8단 패키지가 수율과 전력 효율 면에서 유리하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공급 부족이 단순히 가격 문제가 아니라, 채택 가능한 구성 자체를 재정의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HBM을 사고 싶은 기업과 HBM을 만들어야 할 공급 업체가 만나는 지점이 자연스럽게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간 셈입니다.
AMD와 PC·노트북 업체도 같은 흐름인가
AMD도 같은 흐름에 합류했습니다. 리사 수(Lisa Su) AMD CEO는 2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총소유비용(TCO) 대비 이점이 크지 않을 경우 메모리 구성을 조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빅테크 한 기업의 판단이 아니라 HBM 공급망 전체의 신호로 읽힙니다.
데이터센터 밖에서도 움직임은 비슷합니다. PC·노트북 제조사들도 원가 절감을 위해 저사양 메모리 채택을 늘리고 있다. AI 서버용 HBM과 일반 PC용 D램은 직접 경쟁은 아니지만, 동일 메모리 업체의 Capacity를 두고 우선순위를 다투는 셈입니다. 두 시장이 동시에 저사양으로 기울면 메모리 업체가 HBM 대비 상대적으로 수요가 약한 일반 D램 생산 비중을 재조정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수요는 줄어드는가, 시장 규모는 유지되는가
증권가에서는 2027년 HBM 수요가 칩당 탑재량 감소로 10% 정도 줄어들 수 있다는 관측과 함께, 같은 기간 가속기 출하량 자체가 늘면서 전체 HBM 시장 규모는 유지될 수 있다는 반론이 공존합니다. 두 시나리오가 동시에 유통되는 이유는 HBM 공급 병목이 단기 현상인지, 구조적 전환인지에 대한 시각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메모리 부족이 길어질수록 단가는 더 오를 것’으로 보고, 다른 한쪽은 ‘가속기 단가 인하와 출하량 증가로 시장 규모는 흡수된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 현실로 다가오는지는 결국 HBM 공급 Capacity가 얼마나 빨리 따라오느냐에 달렸습니다. 단가가 오를 시나리오가 맞으면 사양 하향이 가속기 가격 인하까지 연결되기 어렵고, 출하량이 늘 시나리오가 맞으면 고객사 입장에서는 HBM 물량 확보 경쟁이 더 치열해질 수 있습니다.
용어 정리
- HBM(고대역폭메모리, High Bandwidth Memory): 여러 개의 메모리 다이를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통로를 넓힌 DRAM 규격입니다. AI 가속기의 연산 결과를 빠르게 읽고 쓰는 데 쓰입니다.
- HBM4 / HBM4E: HBM의 6세대(HBM4)와 그 개선형(HBM4E)입니다. 세대 번호가 높을수록 대역폭과 단위 용량이 커집니다.
- 단(Hi): HBM 패키지 안에 적층되는 메모리 다이의 층수입니다. 12단은 다이를 12층 쌓은 구성, 8단은 8층입니다.
- AI 가속기: 행렬 연산 등 AI 학습·추론에 특화된 반도체입니다. 엔비디아 GPU, AMD 가속기 등이 대표적입니다.
- 칩플레이션: 반도체 가격 상승으로 IT 기기 원가·판매가가 함께 끌어올려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신조어입니다.
생각해볼 점
- 192GB·256GB는 당초 1TB 계획의 4분의 1~5분의 1 수준입니다. 사양 하향이 ‘같은 가격에 더 많은 가속기 판매’ 전략이라면, 클라우드 사업자 입장에서 AI 학습·추론 워크로드 배치 전략이 어떻게 바뀌는지 점검이 필요합니다. 한 모델이 한 가속기에 올라가지 못하면 여러 칩에 분산하는 멀티 노드 구성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 AMD가 ‘TCO 대비 이점이 크지 않을 경우 조정’이라는 표현을 쓴 만큼, 엔비디아의 사양 하향도 단가 유지가 전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일 가격에 줄어든 메모리를 받는 구조가 성립하는지, 아니면 가속기 가격 자체가 함께 내려가는지가 다음 변수입니다.